2009년 9월 28일 월요일

"객관적 진실이란 과연 있을까"

<디케의 눈>, 금태섭

-제삼자에게 객관적 진실이란 과연 있을까? 나는 내가 '라쇼몽'에 등장하는 나무꾼과 같이 진실을 말한다고 생각하지만, 과연 내가 나무꾼일까? 그리고 과연 나무꾼의 말은 진실일까?

-부장 검사들이 새로 임관한 검사들을 훈련시키기 위해 사건과 관계없는 사소한 일들을 묻는 일이 있다. 예를 들면 피의자가 다니는 회사의 주소가 어디냐는 둥, 형제가 몇 명이냐는 둥 물어본 다음에 대답을 잘하지 못하면 기록을 열심히 읽어야 한다고 일장 훈시를 하는 식이다.

-"사실은 말이죠. 버너 장사가 물을 끓이고 있었는데, 그 물이 저한테 뜨겁다고 하는 거예요. 그래서 그 물을 버너 장사에게 부어버렸어요." 그 때 교도관이 뽑아준 커피가 테이블 위에 있었는데 얼른 치워버렸다. 만약 커피가 뜨겁다고 말을 걸면 나한테 부어버리지 않겠는가?

-로젠버그 부부가 사형을 당한 지 40년이 넘게 지난 1995년, 미국 국가안전보장국(NSA)은 베노마 프로젝트라는 이름의 서류를 공개했다....로젠버그가 유죄라는 증거는 여기에서 그치지 않았다. 1990년 니키타 흐루시초프의 자서전이 그의 사후 20년 만에 출간되었다. 흐루시초프는 여기에서 로젠버그 부부를 지칭하면서 "그들은 우리가 원자폭탄의 개발을 앞당기는 데 중요한 공헌을 했다."고 말했다.

-나는 이 짧은 동영상(두순자 가게 CCTV동영상)이야말로 형법을 공부하는 사람들이 꼭 보아야 할 중요한 자료라고 생각한다. 수사나 재판과정에서 재구송되는 사건의 모습과 실제로 벌어진 일이 얼마나 차이가 아는지, 직접 목격하지 못한 사건에 대해 생각하고 판단을 내린다는 것이 얼마나 어렵고 조심스러운 일인지 실감나게 보여주기 때문이다.

-두순자에게 집행유예를 선고한 판사의 결정은 잘못된 것이었을까. 대부분의 법학자들은 그렇지 않다고 생각한다. 형벌은 개인에 대한 것이지 사회적인 목적을 달성하기 위한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패리스 힐튼이 나이트클럽에 놀러 가던 길이라고 해서 신호를 위반했을 가능성이 높다고 하는 것이 논리적으로 말도 안 된다는 건 누구나 잠깐만 생각하면 알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패리스 힐튼의 변호인은 필사적으로 그런 사실을 재판에서 공개하면 안 된다고 주장한다. 바로 배심재판 때문이다....미국 로스쿨에서 가장 많이 쓰이는 증거법 교과서 중 하나를 보면 제일 첫 번째 나오는 제목이 '왜 증거법이 있어야 하는가'이고 그 이유로 배심원들에 대한 불신을 들고 있다.

-무엇보다 아직 재판이 열리기 전 수사단계에서 변호인이 참여해야 한다는 주장에 대한 반대가 많았다....그러나 이에 대해 연방대법원은 이렇게 말한다. "수사과정에서 자백하는 경우가 많다는 사실은, 그 단계야말로 변호인의 도움이 가장 절실하게 필요한 따라는 것을 뜻하는 것이다. 자백이 거의 이루어지지 않는 단계에서만 변호인의 도움을 받을 수 있다는 것은, 그야말로 공허한 것이 될 뿐이다"

-법률로 모든 것을 해결하려는 시도는 주로 강권통치나 엄격한 통제가 이루어지는 사회에서 여러 번 행해졌지만 사회변화나 문화현상까지 규제하려는 법률만능주의는 한 번도 성공한 일이 없다. 지금 거리를 활보하는 젊은이들의 자유분방한 옷차림이나 아직도 성업 중인 많은 보신탕집들이 이것을 증명하고 있다.

-오늘 음란물이라고 손가락질을 당하는 것들 중에서 수십 년이 흐른 후에는 칭송받는 예술품이 되지 말라는 법은 없는 것이다. 이 문제에 관해서 가장 기억에 남는 발언을 한 사람은 포터 스튜어트라는 미국 연방대법관이다. <연인들>이라는 제목의 프랑스 영화를 상영한 죄로 벌금 2500달러를 선고받은 사건에 대한 판결문에서 그는 "(음란물이 어떤 것인지 명확하게 정의하기는 어렵지만) 그걸 보면 안다 I know it when I see it."라는 유명한 말을 남겼다....'로미오와 줄리엣'을 쓴 셰익스피어나 '롤리타'를 쓴 블라디미르 나보코프도 처벌하란 말이냐고 핏대를 높이는 사람도 있을지 모른다. 그러나 예술적 가치를 담고 있는 문학이나 미술작품, 영화와 포르노는 분명히 구별할 수 있다. 그 구별의 기준이 무엇이냐고 고집스럽게 묻는 사람을 만난다면 나는 이렇게 말하고 싶다. "보면 안다."

-실제로 대법원에 가는 사건을 걸러내는 상고허가제라는 걸 만든 일이 있다. 그런데 그게 하필이면 1980년 당시 보안사령관 전두환이 위원장으로 있던 국보위에서 만들어진 것이다. 대법원에 가는 사건을 제한하려고 하면 당장 권의주의 시대의 발상이라는 말을 듣게 된다. 정말 이 생각만 하면 전두환이 더 미워진다. 그런데 좀 더 생각해보면 정말 대법원에서 1년에 2만 건을 처리하는 게 서민을 위하는 걸까?

"후손들까지 프랑스로 가게 할 수는 없지 않은가"

<클레오파트라의 바늘>, 김경임

임진왜란과 구한말 시기를 거쳐 일제시대까지 우리 민족은 미국, 일본, 프랑스, 러시아 등 열강들에 의해 그 수를 헤아리기도 힘든 문화재를 약탈 등 부당한 방법으로 빼앗겨 왔다. 문화재청에 따르면 약탈돼 20여개국에 유출된 문화재는 집계된 것만 7만 6천여점에 달한다. 민간 단체들은 실제 정확한 수량이 그 10배가 넘을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이 중 140여년 전 프랑스에 빼앗긴 조선 최고의 문화재 강화도 외규장각 도서는 그 방대한 양에 있어서나 내용의 측면에서도 반드시 반환받아야 할 문화재로 꼽힌다. 그렇다면 외규장각 도서 반환이 왜 중요하고, 아직까지 프랑스로부터 돌려받지 못하고 있는 이유는 무엇일까?

1866년(고종 3년) 10월 중국에 주둔해 있던 프랑스 극동함대 사령관 로즈 제독은 군함 7척과 180여명의 군대를 동원해 강화도를 침략했다. 천주교 선교활동을 벌인 프랑스 신부 9명이 처형되자 보복 차원에서 한 일이었다. 프랑스군은 강화도를 점령하고 양민을 학살했는데, 조선군의 반격을 받고 수십 명의 사상자가 나오자 점령 25일 만에 퇴각했다. 당시 중국 주둔 프랑스군의 공격은 프랑스 정부의 공식 명령에 따른 것도 아니었고, 일개 개인 부대가 일으킨 보복차원의 침략이었다. 이 사건이 '병인양요'이다. 프랑스군은 후퇴하면서 강화도 외규장각에 소장된 서책을 불태우고 약탈해 갔다. 당시 외규장각에는 6천 1백 권의 도서가 소장돼 있었는데, 프랑스군은 퇴각하면서 5천 8백권을 태워버렸고, 서책 340종 중 299권의 '왕실의궤집'을 가져갔다. 이것이 바로 우리가 프랑스에 빼앗긴 외규장각 도서라 부르는 것들이다.

약탈된 외규장각 의궤의 가치는 어느 정도일까. 먼저 '의궤'란 왕위 계승, 왕실의 관혼상제를 비롯해 왕실의 모든 행사의 규칙과 격식, 진행을 그림과 글로 기록한 화보 의례집으로, 조선 왕실문화의 정수이자 유교문화의 시각화라고 할 수 있다. 원래 의궤는 조선 왕조 초기부터 제작됐으나 임진왜란에서 모두 소실되고 당시 외규장각에 소장돼 있던 의궤는 1601년 인조 이후에 만들어진 것들이었다. 의궤는 1종마다 3~8부씩 제작해 한양의 규장각과 춘추관, 예조, 그리고 외규장각 등 4대 사고에 분산 보관돼 있었다. 현재 약 1천종 3천여책이 남아 있는데, 이중 프랑스 국립도서관에는 병인양요 때 약탈해 간 191종 297권이 보관돼 있다. 4대 서고 중 외규장각에 소장됐던 의궤는 다른 의궤들과 무슨 차이가 있을까. 의궤는 왕이 직접 보는 '어람용 의궤'와 왕이 친람하지 않는 '비어람용 의궤'로 나뉜다. '어람용 의궤'는 특급 재질의 종이인 '초주지'를 사용해 제작됐는데, '초주지'는 오늘날에는 제작 방법을 아는 사람이 없을 만큼 특별한 종이다. '어람용 의궤'는 이 '초주지'에 글씨와 그림을 넣고 녹색 비단으로 싸서 놋쇠 경첩으로 묶어 제작됐는데, 이는 세계 출판 사상 유례가 없는 특별한 제본 방법이다. 왕이 친람하지 않는 비어람용 의궤 역시 최고의 닥나무 종이로 제작됐는데 그림은 목판 도장을 찍고 채색하는 방식이었다. '어람용 의궤'는 왕의 친람이 끝나면 외규장각에 영구 보존됐다. 프랑스군이 약탈해 간 외규장각 도서 300여권은 '어람용 의궤'였던 것이다.

우리 정부가 외규장각 도서의 존재를 알게 된 것은 그리 오래 된 게 아니었다. 약탈된 의궤들은 프랑스로 옮겨져 약탈된 이듬해인 1867년 프랑스 국립도서관으로 보내졌다. 이후 1975년 프랑스 국립도서관 사서로 일하던 재불 교포 박병선 박사가 찾아낼 때까지 110여년 동안 프랑스 국립도서관 창고에서 '중국 책'이라는 꼬리표를 달고 방치돼 있었다. '발견' 이후 80년대 박병선 박사에 의해 두 차례 외규장각 도서에 대한 해제가 발표됐고, 국내 학자들도 이에 대한 논문을 발표하면서 외규장각 도서 반환 움직임이 시작됐다. 서울대가 91년 정부에 도서반환 추진을 요청한 후 92년에는 주불 한국대사관이 외규장각 도서반환을 요청하면서 정부 차원에서도 나서게 됐다.

특히 우리는 90년대 고속철도 사업자로 프랑스 떼제베(TGV)를 선정하는 과정에서 약탈된 도서를 반환받을 '절호의 기회'를 맞게 됐다. 당시 일본의 신칸센, 독일의 이체(ICE)와 경쟁하던 프랑스는 한국의 고속철도 사업 수주에 '국운'을 걸다시피 했고, 프랑수아 미테랑 당시 대통령은 이를 성사시키기 위해 93년 9월 프랑스 대통령으로는 최초로 한국을 방문해 외규장각 의궤 중 '휘경원원소도감' 1권을 건네줬다. 양국은 김영삼 대통령과 미테랑 프랑스 대통령의 정상회담에서 외규장각 도서를 '교류 방식에 의해 영구 대여'한다는 원칙에 합의했다. 이를 두고 한국 측은 외규장각 도서를 전부 돌려받기로 했다고 발표해 버렸고, 우리 국민들은 미테랑 대통령의 '결단'에 감복하는 분위기였다. 이후 떼제베는 고속철도 사업자로 선정됐다.


그런데 미테랑 대통령이 돌아가고 나서부터 일은 꼬이기 시작했다. 양국의 실무교섭에서는 프랑스 측은 외규장각 도서를 한국에 10년 기탁 후 5년 단위로 자동 연장하는 방식, 즉 사실상 영구기탁하되 한국이 의궤와 동등한 가치가 있는 고서를 프랑스에 기탁하기로 잠정 합의했다. 조건없는 '영구 대여'에서 사실상 '등가 교환'으로 바뀐 것이다.

조선 최고의 문화재인 외규장각 의궤와 같은 가치(등가)를 가진 문화재가 국내에 존재할 수 없다. 설사 등가의 문화재가 있다고 치더라도 이를 내주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점에서 합의는 처음부터 지켜질 수 없는 합의였다. 한국 측은 94년 외규장각 의궤를 '영구 대여'하는 대가로 우리 문화재 도서 중 337권을, 95년에는 471권의 고도서를 프랑스에 기탁하겠다고 제의했다. 이에 대해 프랑스는 한국의 도서가치가 낮다며 협상에 소극적인 태도를 보였다. 97년 한국 측은 다시 279권의 도서와 370점의 중국동전을 3차목록으로 제시했지만, 프랑스측은 여전히 만족스럽지 못하다는 반응을 보였다. 외규장각 도서를 반환받는 대신 다른 문화재를 내주는 데 대한 국내 여론도 차갑기는 마찬가지였다.

그러는 사이 미테랑 정권이 우파인 시라크 정권으로 넘어가면서 문제 해결은 더욱 어려워져 갔다. 정부 차원의 협상이 안 풀리자 2001년에는 민간 협상단이 나서 재차 '등가 교환'방식에 잠정 합의했지만 결과는 90년대와 크게 다르지 않았다. 2006년 한불 수교 120주년을 맞아 정부가 다시 반환 협상의 전면에 나섰으나, 현재까지 외규장각 도서중 30권에 대한 디지털화 작업을 제외하고 반환에 대해서는 뚜렷한 진전이 없는 상태다.

외규장각 의궤 반환에 대해 국내 여론은 단순히 약탈된 우리의 문화재를 반환하지 않는 프랑스에 대한 감상적 비판에 머물러 있다. 물론 제국주의 시기 약탈해 간 문화재를 내놓지 않고 있는 프랑스의 국수주의적 자세는 비판받아 마땅하다. 프랑스측은 제국주의 시절 약탈해 간 문화재를 "보편주의 관점에서 많은 사람이 볼 수 있도록 프랑스에 둬야 한다"고 억지를 부리고 있다. 이는 벤츠, 푸조, 도요타 등 명품 자동차를 모두 수집한 자동차 도둑이 '이미 푸조와 도요타를 갖고 있으므로 벤츠만을 가진 원래 주인보다 더 다양한 자동차들을 보여줄 수 있다'면서 반환을 거부하는 것과 다를 바 없는 태도다. 또한 옮겨온 지 오래됐기 때문에 '귀화 문화재'로 봐야 한다거나, 한국의 외규장각 도서를 돌려주면 루브르 박물관에 있는 대부분의 유물을 모두 돌려주어야 하기 때문에 불가능 하다는 이른바 '도미노 이론'도 반환 거부 논리의 단골메뉴다. 심지어 이들은 "프랑스의 약탈 덕분에 문화재가 잘 보존되고 관리됐다"며 아시아.아프리카 국가들은 문화재 관리 능력이 없다는 생각을 노골적으로 내비치기도 한다. 이는 프랑스 뿐만 아니라 제국주의 시기 문화재를 약탈해 자국의 박물관들을 채운 영국.독일 등 서유럽 국가들에게서 공통적으로 찾아볼 수 있는 인식이다.

그러나 이에 대해 사안이 불거질 때마다 불거졌던 '배신감' 차원(이른바 '떼제베 먹튀')의 비판적인 국내 여론과는 별개로 정부 차원의 치밀하고 끈질긴 반환 노력은 부족한 게 사실이었다. 일례로 90년대 최초 반환요청 때부터 2000년대 초까지 한국 정부는 프랑스 국립도서관이 소장한 외규장각 의궤의 정확한 내역조차 파악하지 못한 채 박병선 박사의 해제에만 의지하고 있었다.(한국 정부의 실사는 2002년에야 이루어졌다) 반환받아야 할 문화재가 무엇인지도 모르면서 내놓으라고 소리친 격이었다. 94년 당시 외규장각 도서 반환을 확실히 약속받지 못한 상태에서 미테랑 대통령의 말 한마디에 덜컥 떼제베를 고속철도 사업자로 선정한 것도 잘못이었다. 또한 이후 김영삼 정권에서 김대중.노무현 정권으로 바뀌면서 외교부 등 정부 차원의 노력도 지지부진했다. 문화재 환수에 앞장서야 할 문화재청도 문화재 환수 담당 인력 1명에, 예산은 2007년에 최초로 편성된 이후 줄곧 2억원에 불과한 실정이다.

제국주의 열강에 빼앗긴 우리 문화재는 오늘도 여전히 전세계를 떠돌고 있다. 가깝게는 조선 최고의 그림인 '몽유도원도'가 일본에 있으며, 혜초의 '왕오천축국전'과 세계최초의 금속활자본인 '직지'는 프랑스 루브르 박물관에 있다. 이밖에도 수천점의 이름없는 문화재가 제대로 평가받지 못한 채(일례로 140년 동안 외규장각 의궤에 대한 프랑스의 연구는 전무하다) 전세계에 흩어져 있다. 이들을 모두 찾아오기는 현실적으로 어려운 게 사실이지만, 외규장각 도서의 경우처럼 드문 기회가 종종 찾아오기도 한다. 비록 지금까지 시행착오를 겪었지만 여전히 기회는 살아 있다. 민간 단체인 문화연대는 2007년 프랑스 정부를 상대로 2년여 동안 준비해 온 반환소송을 시작했으며, 지난해 부터 파리 행정법원에서 재판이 진행되고 있다. 정부 차원에서도 내년 사르코지 프랑스 대통령의 방한을 적극 활용해 치밀한 반환노력을 재개해야 한다. 역사 드라마에서만 봐오던 조선시대 왕실의 모습을 보기 위해 후손들까지 프랑스로 가게 할 수는 없지 않은가.

2009년 9월 24일 목요일

"박정희 향수에서 벗어나기 위해 또다른 진실게임이 필요한 것처럼"

<서거 60주년에 다시 보는 김구>, 박태균

-안두희('시역의 고민') "여기 공공연히 국가를 중상하고 국시를 훼방하며 국책을 반대하고 민심을 선동하는 이적행위자가 있다! 그는 바로 우리의 위대한 영도자이시오, 국부이시오, 애국자이신 김구 선생이시다. 이 이가 김국 선생이시기 때문에 정부 아니 우리의 엄연한 법도 손을 못 대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는가"

-1990년대 이후 근현대사 역동기의 인물들에 대한 연구가 활발히 진행되고 있는 중에도 김구라는 인물에만 초점을 맞춘 학문적으로 주목할 만한 연구가 없다는 것은 놀라운 사실이다.

-소장 학자들은 모스크자 3상협정의 내용이 '신탁통치안'으로 잘못 알려지면서 정치적 분열이 심화되었다는 연구성과를 속속 내놓았다. 서중석은 반탁운동이 민족운동이 아닌 '중경 임시정부'를 위한 정치운동이었다고 보면서, 반탁투쟁은 "신탁통치 반대보다는 중경 임시정부 승인요구가 우선하였던 중경 임시정부 추대운동이었으며, 그것은 또한 분단체제 지탱의 지주였던 반공이데올로기가 본격적으로 작동되기 시작하였을을 말해주는 것"이라고 규정했다.

-현실주의적이고 성공을 이룬 것만 주목할 일이 아니라, 대로는 실현가능성이 적었고 결국 실패했음에도 오히려 성공한 사건보다 더 주목해야 하는 역사적 사실들이 존재한다.

-<대안교과서:한국현대사>의 김구에 대한 소개는 일면 객관적인 형태를 띠면서도 객관적이지 못하다. 1896년 명성황후의 원수를 갚고자 죽인 것이 일본의 군인이 아니라 민간인인 상인이었다는 근거마저도 불명확한 주장, 남북 지도자회담이 실패했다는 것, 그리고 이후에도 대한민국 건국에 참여하지 않았다는 점만이 기술되어 있다.

-김구 인식의 전환을 요구한 '교과서 포럼'의 '역사전쟁'은 대한민국 수립에 대한 새로운 해석을 전제하고 있다. 냉전에 저항하기보다는 미국에 편승해서 남한에 먼저 정부를 세우는 것이 가능한 범위 내에서 차선의 선택이었으며, 건국 과정은 "한국인들에게 정치적으로 민주주의와 경제적으로 시장경제를 자신의 능력으로 추구해볼 수 있는 국제적 조건으로서 이른바 미국체제가 한반도의 남쪽에 들어선 글로벌한 사건"으로 규정되었다. 만약 이 주장을 그대로 받아들인다면, 김구의 행동은 반문명적이었으며, 반글로벌한 행동이었다.

-김구의 일생을 '민족주의자'라는 상징으로만 규정할 경우, 이념보다는 민족을 우선시하는 정치사상과 노선을 갖고 있던 그의 삶을 그려내야 한다. 그러나 이념보다 민족을 우선시했다고 분명하게 이야기할 수 있는 것은 1945년 해방 직전의 몇 년간, 그리고 1948년 남북 지도자회담 이후의 시기밖에 없다. 오히려 그의 생애에서 더 많은 시기를 차지했던 것은 임시정부의 법통을 지키기 위해 공산주의자, 사회주의자와의 연합을 반대했던 기각니었다. 아울러 대부분의 연구자들이 동의하고 있듯이 1945년부터 1947년까지의 반탁운동이 임시정부를 정치의 중심에 놓기 위해 좌우익의 갈등을 심화시키는 역할을 했다는 분석에 이르게 되면, 김구를 하나의 상징적 언어로 규정하는 것이 불가능한 작업임을 잘 알 수 있다.

-김구가 평생을 통해 했던 활동 중 현실적으로 실현가능성이 있었던 것은 거의 없었다. 초기 동학농민전쟁에 참여한 것에서부터 의병운동, 임시정부 참여, 그리고 분단정부 수립 반대운동에 이르기까지, 김구 또는 김구가 참여했던 조직의 목표가 단기적으로 실현된 예는 단 하나도 찾을 수 없다....비운의 독립운동가였던 김산의 독백에서 나타나는 것처럼 김구 역시 '오직 스스로에게만 승리한' 정치인으로 봐야 할까?

-김구가 일생을 통해 보여준 정치적 활동들이 한국 근현대사에서 한국 사람들, 그리고 한국 사회가 보여주고자 했던 것들을 대변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당대의 김구에 대한 객관적인 조명이 절실하다. 박정희의 향수에서 벗어나기 위해 또 다른 진실게임이 필요한 것처럼.


2009년 9월 22일 화요일

"서유럽이나 북미 사례를 보여 주는 것으로 간단히 정리한다"

<정치에너지>, 정세균

 

-우리가 번번히 경고하는 민주주의의 위기 징후는 다름 아닌 민주당의 위기가 될지도 모른다는 게 솔직한 내 생각이다.

 

-공자는 仁의 의미를 묻는 제자에게 "말을 더듬는 것"(강의목눌 근인)이라고 답했다.

 

-중정기념관이 민주기념관으로 바뀌어 개장하던 날 국민당 지지자들이 몰려와 '천수이볜 타도를 외쳤다.

 

-그들이시도한 것은 '역사에 대한 긍정'이라기보다는 '보수파에 대한 긍정'이었다.

 

-어느 나라든 지폐를 보면 근대국가의 형성에 결정적 역할을 한 인물들을 집어넣어 일상 속에서 사용하며 국민적 일체감과 역사의식을 불어넣는 상징으로 삼고 있다...이러한 화폐를 갖지 못한 것은 우리 현대사의 커다란 비극을 보여준다.

 

-국민의 기본권 침해를 본업으로 하는 공안 기관이 국정의 최고 지위를 누리는 시대를 살았다.

 

-'저 빛나는 4월이 가져온 새 공화국에 사는 작가의 보람을 느낍니다'라고 했던 청년 최인훈의 소감이 떠올랐다. 이제는 '저 빛나는 6월이 가져온 새 공화국'이랄까.

 

-기본권으로서 인권이 침해당할 소지를 없애기 위해 권력분립이라는 민주적 장치가 마련되었다고 가르쳤다. 한동섭 교수가 반복해서 강조한 것은 국민의 기본권과 권력의 분립이 없다면 근대적 의미의 헌법이 아니라는 것이었다.

 

-그가 돌아와 몸을 추스르고 있는 동안 법대의 동료 교수들 여럿을 국민투표를 앞두고 전국을 다니며 유신헌법을 홍보했다.

 

-그로 인해 법관의 길을 포기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남다른 정의감이 충만하진 않았지만 은사를 죽음으로까지 몰고 간 법적 현실과 떳떳이 대면할 자신이 없었다.

 

-지금 생각하면 어떻게 그러고 살았나 싶지만, 그때는 모두가 그렇게 살았다.

 

-내가 보기에 그들은 현실에서 변화를 이루는 데 실패하자 법을 고쳐 이상에 다가가려고 하고 있다. 현실에서 이루지 못한 것을 법이 해결해 주지는 않는다.

 

-Hic Rhodus! Hic Saltus!

 

-유시민의 논리에 따르면 우리가 맞닥뜨린 민주주의의 위기에 대해 10년간 집권한 민주파의 책임은 면제된다. 난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98년 현대차 파업 때 그가 중재 단장이었고, 내가 사측을 담당했다. 사실 그 일 말고는 나에 대해 회상할 일이 마땅히 없었을 것이다.

 

-명백한 선거 부정이 있었다....뒷날 이 일로 강현욱 캠프의 관계자들이 실형을 선고받았다.

 

-"아니 세일즈를 한창 할 때에 알엔디하면 어쩌자는 겁니까?"..대통령이 된 뒤로 노무현은 나를 볼 때마다 "어떻게 세일즈하면 될는지 방안을 내보쇼!"라고 농반 진반으로 말을 걸곤 했다.

 

-"지난 선거에서 민주당 후보를 찍었어야 한다"라는 주장은 들리지 않는다. 여기에 생각이 이르면 모골이 송연해진다.

 

-남은 선거에서 절대로 지지 않는 정당이 되도록 만들겠다. 집권하면 정당정부의 이상을 추구하겠다. 대통령 개인의 정부가 아니라 민주당의 정부가 되도록 만들겠다...지금 이명박 정부와 한나라당이 이 정도로 국민을 실망시키고 있는데도 우리가 집권하지 못한다는 것은 국민에 대한 배반이나 다름없다.

 

-머리에 쥐가 나도록 고민하고 며칠이고 준비해야 했다. 다그치는 김대중의 모습이 잠자다 꿈에 나올 정도였다.

 

-가망이 없어도 보수 패권에 용감하게 도전해 온 그들을 존경한다...영남에서 개혁 세력에 몸담았다고 해서 지나친 우월 의식을 가지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

 

-'조직가에게 타협은 핵심적이고 아름다운 단어이다. 타협은 언제나 실질적인 활동 속에 존재한다. 타협은 거래를 하는 것이다. 거래는 절대적으로 필요한 숨 고르기, 보통의 승리를 의미하며, 타협은 그것을 획득하는 것이다'

 

-청와대를 나오며 야당이 무슨 주장을 하는지도 보고를 받으라고 권고했다. 고개를 끄떡였지만, 정말 그랬는지는 모르겠다.

 

-워룸이라는 지하실에서 문 닫고 회의하는 걸 대단한 것처럼 생각한다. 그 아랫사람(이동관)은 "국회가 경제 속도전에 걸림돌이 된다"라는 말까지 했다.

 

-취재하는 기자들이 물러가자 신경하 기독교 감리회 감독회장은 좀 더 적극적으로 나를 격려해 주었다.

 

-많은 경우 마치 백지상태에서 그림 그리듯이 아름답고 보기 좋은 비전을 내놓는다. 그것이 실현되기 위한 조건과 제약에 대해서는 무관심하거나 무지하다. 가능하냐고 물어보면 서유럽이나 북미의 사례를 몇 가지 보여 주는 것으로 간단히 정리한다.

 

-작은 기회와 가능성을 키워 여러 사람들과 함께할 수 있는 희망을 개척해야 한다. 기회와 가능성을 소중히 여기는 자세야 말로 정치에서 으뜸이 되는 덕목이라는 사실을 나는 경험을 통해 확신하게 되었다.

 

-초선 의원 시절에 국회 재경위에서 제일 많은 노력을 기울인 사안은 한국은행 독립이었다...우리가 집권하자 선거 승리를 위해 통화정책을 쓸 유혹이 생기더라도 그러지 못하게 되었다.

 

-전범으로 자리잡은 영미 의회의 운영은 좋은 법규 때문이 아니라 관례들이 쌓인 덕분이다. 관행이 법규에 준하는 효력을 갖게 된 것이다. 조문에 없어도 지켜지는 법이라면 가장 강한 법이다.

 

-토론이 없이 결정만 있는 의회는 의회가 아니다. 의회를 뜻하는 영어 Parliament는 불어로 '말하다'라는 parler에서 왔다지 않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