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서거 60주년에 다시 보는 김구>, 박태균
-안두희('시역의 고민') "여기 공공연히 국가를 중상하고 국시를 훼방하며 국책을 반대하고 민심을 선동하는 이적행위자가 있다! 그는 바로 우리의 위대한 영도자이시오, 국부이시오, 애국자이신 김구 선생이시다. 이 이가 김국 선생이시기 때문에 정부 아니 우리의 엄연한 법도 손을 못 대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는가"
-1990년대 이후 근현대사 역동기의 인물들에 대한 연구가 활발히 진행되고 있는 중에도 김구라는 인물에만 초점을 맞춘 학문적으로 주목할 만한 연구가 없다는 것은 놀라운 사실이다.
-소장 학자들은 모스크자 3상협정의 내용이 '신탁통치안'으로 잘못 알려지면서 정치적 분열이 심화되었다는 연구성과를 속속 내놓았다. 서중석은 반탁운동이 민족운동이 아닌 '중경 임시정부'를 위한 정치운동이었다고 보면서, 반탁투쟁은 "신탁통치 반대보다는 중경 임시정부 승인요구가 우선하였던 중경 임시정부 추대운동이었으며, 그것은 또한 분단체제 지탱의 지주였던 반공이데올로기가 본격적으로 작동되기 시작하였을을 말해주는 것"이라고 규정했다.
-현실주의적이고 성공을 이룬 것만 주목할 일이 아니라, 대로는 실현가능성이 적었고 결국 실패했음에도 오히려 성공한 사건보다 더 주목해야 하는 역사적 사실들이 존재한다.
-<대안교과서:한국현대사>의 김구에 대한 소개는 일면 객관적인 형태를 띠면서도 객관적이지 못하다. 1896년 명성황후의 원수를 갚고자 죽인 것이 일본의 군인이 아니라 민간인인 상인이었다는 근거마저도 불명확한 주장, 남북 지도자회담이 실패했다는 것, 그리고 이후에도 대한민국 건국에 참여하지 않았다는 점만이 기술되어 있다.
-김구 인식의 전환을 요구한 '교과서 포럼'의 '역사전쟁'은 대한민국 수립에 대한 새로운 해석을 전제하고 있다. 냉전에 저항하기보다는 미국에 편승해서 남한에 먼저 정부를 세우는 것이 가능한 범위 내에서 차선의 선택이었으며, 건국 과정은 "한국인들에게 정치적으로 민주주의와 경제적으로 시장경제를 자신의 능력으로 추구해볼 수 있는 국제적 조건으로서 이른바 미국체제가 한반도의 남쪽에 들어선 글로벌한 사건"으로 규정되었다. 만약 이 주장을 그대로 받아들인다면, 김구의 행동은 반문명적이었으며, 반글로벌한 행동이었다.
-김구의 일생을 '민족주의자'라는 상징으로만 규정할 경우, 이념보다는 민족을 우선시하는 정치사상과 노선을 갖고 있던 그의 삶을 그려내야 한다. 그러나 이념보다 민족을 우선시했다고 분명하게 이야기할 수 있는 것은 1945년 해방 직전의 몇 년간, 그리고 1948년 남북 지도자회담 이후의 시기밖에 없다. 오히려 그의 생애에서 더 많은 시기를 차지했던 것은 임시정부의 법통을 지키기 위해 공산주의자, 사회주의자와의 연합을 반대했던 기각니었다. 아울러 대부분의 연구자들이 동의하고 있듯이 1945년부터 1947년까지의 반탁운동이 임시정부를 정치의 중심에 놓기 위해 좌우익의 갈등을 심화시키는 역할을 했다는 분석에 이르게 되면, 김구를 하나의 상징적 언어로 규정하는 것이 불가능한 작업임을 잘 알 수 있다.
-김구가 평생을 통해 했던 활동 중 현실적으로 실현가능성이 있었던 것은 거의 없었다. 초기 동학농민전쟁에 참여한 것에서부터 의병운동, 임시정부 참여, 그리고 분단정부 수립 반대운동에 이르기까지, 김구 또는 김구가 참여했던 조직의 목표가 단기적으로 실현된 예는 단 하나도 찾을 수 없다....비운의 독립운동가였던 김산의 독백에서 나타나는 것처럼 김구 역시 '오직 스스로에게만 승리한' 정치인으로 봐야 할까?
-김구가 일생을 통해 보여준 정치적 활동들이 한국 근현대사에서 한국 사람들, 그리고 한국 사회가 보여주고자 했던 것들을 대변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당대의 김구에 대한 객관적인 조명이 절실하다. 박정희의 향수에서 벗어나기 위해 또 다른 진실게임이 필요한 것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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